서울 4대 궁궐, 종묘 및 조선왕릉 정보

서울 4대 궁권, 종묘 및 조선왕릉 정보
서울 4대 궁궐, 종묘 및 조선왕릉 정보

경복궁


경복궁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는데 그 후 복구되지 못하다가 270여년이 지난 1867년(고종 4)에 다시 지어졌습니다. 고종 대에 들어 건청궁과 태원전, 집옥재 등이 조성되었으며, 특히 건청궁 옥호루는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비운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창덕궁

창덕궁(昌德宮)은 1405년(태종 5) 법궁인 경복궁의 이궁(離宮)으로 창건되었습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10년(광해군 2) 궁궐 중 처음으로 다시 지어졌으며, 이후 역대 왕들이 1867년 경복궁이 중건될 때까지 약 270여년 동안 창덕궁을 더 많이 사용하여 실질적인 법궁의 역할을 하였습니다다.



덕수궁

덕수궁은 원래 조선 제9대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사저였고, 그 후에도 월산대군의 후손이 살던 곳이었습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도성의 궁들이 모두 소실되자 1593년(선조 26)부터 임시 궁궐로 사용하여 정릉동 행궁(貞陵洞 行宮)이라 불렸습니다. 이후 1611년(광해군 3) 경운궁(慶運宮)으로 이름이 정해지면서 정식 궁궐이 되었다가, 창덕궁이 중건되면서 다시 별궁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897년(광무 1)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창경궁

창경궁은 원래 1418년(세종 즉위) 세종이 상왕 태종을 위해 창건한 수강궁(壽康宮)이 있던 자리였습니다. 이후 1483년(성종 14) 성종이 세 명의 대비(세조의 왕비 정희왕후, 덕종의 왕비 소혜왕후, 예종의 왕비 안순왕후)를 위해 수강궁을 크게 확장하고 궁의 이름을 창경궁이라 하였습니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경계 없이 동궐(東闕)이라는 하나의 궁궐 영역이었으며 주로 왕실 가족들의 생활 공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창경궁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1616년(광해군 8) 중건하였으며, 1830년(순조 30) 대화재로 대부분의 건물들이 소실되었다가 4년 뒤에 중건하였습니다. 그러나 1907년 순종이 황위에 오른 후 창경궁 내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조성하면서 궁궐로서의 모습을 잃기 시작하였습니다. 1911년에는 일제에 의해 궁의 이름마저 창경원(昌慶苑)으로 격하되어 궁궐이 아닌 공원화가 되어 훼손이 심각하였습니다. 광복 후 1983년에 다시 창경궁으로 명칭을 회복한 후, 궁궐 경내에 있던 동물원을 이전하고 본래 궁궐의 모습으로 복원공사가 진행되어 현재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종묘

종묘(宗廟)는 조선과 대한제국의 역대 왕과 왕비,
황제와 황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국가 사당입니다. 조선 건국 후 1395년(태조 4) ‘궁궐을 기준으로 왼쪽에 종묘, 오른쪽에 사직을 세운다’는 예에 따라 현재의 자리에 종묘를 창건하였습니다.


조선왕릉

조선왕릉(朝鮮王陵)은 조선(1392~1897)과
대한제국(1897~1910) 시대에 조성된 왕과 왕비, 황제와 황후의 무덤입니다. 왕릉을 조성할 때에는 풍수사상에 따라 최고의 명당을 선정하고, 최소한의 건조물을 설치하여 주변 자연경관과 잘 어우러지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왕릉 조성과 관련된 모든 절차와 관리실태는 상세하게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모범으로 삼도록 하였고, 현재까지도 각 왕릉에서는 매년 왕릉제향을 지내면서 역사적 전통을 잇고 있습니다. 조선왕릉과 같이 500년 이상 이어진 한 왕조의 왕릉들이 훼손 없이 온전히 남아 있는 예는 세계적으로 매우 드물다고 합니다. 이러한 역사적·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9년 6월 30일, 대한민국 소재 40기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글 천사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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